-구국(救國)의 투혼이 서린 땅 ! 양평-양근. 지평. 양동.용문 등
화서 이항로(1792~1868) 선생은 1792년(정조 16)에 양근군(현 양평군)벽계리에서 태어났다. 서른살에 이미 명성이 경향 각지로 퍼져 그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면암 최익현과 13도 의병대장 유인석등이 문하생으로 이항로의 강학당은 우국충절의 교육장이었다.
양서면 노문리 통방산아래 벽계계곡에 화서 이항로 선생의 생가 및 강학당 그리고 기념관이 있다.
이항로 선생 생가는 선생의 아버지 대에 지은집으로 약 200여 년이 되었으며, 선생이 태어나서 일생을 보낸 곳으로 최익현.홍재학 등 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던 벽계강당이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최근 양평군에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이항로 선생의 위정척사 및 의군우군의 정신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기념관은 팔작지붕을 가진 한옥형태로 내부 전시실에는 이항로 선생의 친필을 비롯 총 41건 5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생가옆에는 강학당이 자리하여 인의(仁義)를 중요한 덕목으로 배운 유생(儒生)들을 중심으로 특히 화서 이항로 선생에 의해 정립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통해 양평인들의 머릿속에 국방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와 11월 단발령의 공포 후 지평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하여 항의한 것도 화서학파의 유림들이었다.
특히 지평의병은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된 대표적인 위정척사운동이다.
화서학파는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맞서며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상해임시정부, 광복군을 이끌었다. 화서학파에서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사람이 233명이고, 103명이 순국했다.
한편, 의병봉기의 거점이 된 교통의 요지 즉 양평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지리적 여건으로 뱃길과 육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그로인해 한양의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그 때문에 의병 봉기는 양근 지평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또한, 용문산이 있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하기에 알맞은 지형과 지세를 갖추어 토벌된 후에도 후기 의병인 정미의병 전쟁때는 권득수, 조인환 의병대장 등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게릴라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지형.지세와 지리적 조건은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주둔(駐屯)시키기에도 적합했다.
양평 양동면 을미의병 묘역에는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며 오늘에서야
“명[銘] 하노니
괴은(槐隱)이 창의(倡義)로 복수보형(復讐保形)하고자 하사(下沙)를 찾아갔네.
퇴앙(退央)이 괴은을 백선(伯善)에 보내니 의기투합(意氣投合)하였다지.
백선을 따라 강릉김씨 석우(石隅)의 8종형제(八從兄弟)가 쾌히 상응(相應)하여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안창(安昌)에 모두 모이니 400(四百)이네.
왜군. 친일관군을 물리쳐 나라지키려 깃발을 높이드니 을미(乙未) 동짓달의 지평의병(砥平義兵)이었노라. 님들이 흘린 피. 땀. 눈물은 50년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효시(嚆矢)되어 고귀한 넋들 쌓여 대한민국 되었으니 아! 무엇으로 보답하리. 어찌 잊으리. “
2021년(辛丑) 4월 9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양평 을미의병정신현창회장 이복재가 삼가 짓다.